“교리에 대한 의구심 꼬리물어… 설교를 해도 공허할 뿐”
“안식교 목사로 10년 넘게 일했을 무렵이었어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 보니 설교를 해도 공허할 뿐이었습니다.
간절함이 생기더군요. 몇 개월을 매달려 기도하는데 어느 날 성령님이 무쇠 같은 제 마음을 만져주시더라고요.
한 달 넘게 매일같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강경구 다산비전교회 목사가 지난 2일 서울 금천구 시흥동 교회에서 안식교 교리의 모순과 위험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2일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교회에서 만난 강경구(56) 다산비전교회 목사의 고백이다. 강 목사는 2000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식교) 목사였다. 하지만 2년 전 안식교의 교리에 회의를 느껴 탈퇴한 뒤 회심, 지난 2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백석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다시 받았다.
강 목사는 안식교 목사로 있으면서 마음이 공허했던 이유를 두고 “안식교도 예수님과 성령의 임재를 말하지만, 이론에 불과할 뿐”이라며 “성경은 구하는 누구에게나 성령을 준다고 하지만, 안식교는 성령이 종말의 때에 이르러서야 늦은 비와 같이 안식교인에게만 내린다고 가르쳐 성령을 느끼지 못하고 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식교는 1915년 당시 예장총회가 면직 제명 처리한 것을 시작으로 1995년 예장통합, 2009년과 2014년 각각 예장고신과 기독교대한감리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됐다. 엘렌 G 화이트(1827~1915)를 마지막 선지자로 보고 그의 계시와 저서를 성경처럼 따른다.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고 영혼 불멸이 아닌 ‘영혼 멸절설’을 믿는다는 이유에서다. 대표적으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부모를 따라 안식교에 빠진 강 목사에게 있어 이러한 교리는 삶의 전부였다. 율법을 중시하는 안식교는 종말을 앞두고 채식과 시골 생활을 하며 품성이 변화돼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 탓에 강 목사도 198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안동의 한 산골로 들어가 개간하며 시골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의심만 생길 뿐 품성의 변화도 구원의 확신도 얻지 못했다. 안식교가 운영 중인 삼육대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며 안식교 목사의 길에 들어섰음에도 안식교 교리에 관한 고민과 의문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강 목사는 “목회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점점 ‘내가 과연 신도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며 “성경을 제대로 다시 읽기 시작하며 그제야 성경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보화를 발견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또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 죽음으로 정죄 받지 않는 복음의 대상이 됐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안식교 ‘조사심판’ 교리에서 십자가의 복음으로 신앙이 바뀌었다”고 했다.
조사심판이란 예수님이 지성소에서 신자들의 죄를 조사하고 기록하며, 여기에 기록된 죄는 최후 심판에 적용된다는 교리다. 강 목사는 이에 “조사심판을 믿는 신앙은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다”며 “조사심판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보혈로 우리 죄에 대해 속죄하시고 완전히 용서했다는 진짜 ‘복음’과는 정반대되는 반쪽짜리 교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강 목사가 안식교를 온전히 빠져나오기까지는 1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탈퇴를 결심하게 만든 건 둘째 아들의 변화였다. 고등학생 때 우울증을 앓던 아들을 놓고 기도하던 그는 “제대로 된 복음을 증거하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때부터 ‘반쪽 복음’이 아닌 온전한 복음을 전하자, 믿음 안에서 회복되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강 목사에 따르면 요즘 안식교의 포교 수법 키워드는 ‘건강’이다. 강 목사는 “안식교는 요양원과 건강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환자를 상대로 교리를 가르치며 포교에 나선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또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전쟁 등이 종말의 징조라고 조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한다. 명확한 교단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간판도 없이 초교파 목회를 내세우는 교회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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