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특집 - 다락방 : 2. 다락방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이단 특집 - 다락방 : 2. 다락방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 한국교회연합 바른신앙수호위원회
2. 다락방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류광수 목사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바로 알아야 그의 ‘신화사상’을 바로 알 수 있고, 그의 전체적인 주장이 어떻게 지방교회와 연관되는지 알 수 있다.
1) 삼위일체의 양태론
류광수 목사는 삼위일체에 있어서 양태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 한다.
“더 확실한 것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신다. 우리 안에 누가 계신단 말이지요.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 보고 삼위일체, 그래 삼위일체 교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단들은 전부 삼위일체를 부인하지요”(EBS 양육 테이프 2).
이 내용은 고려 측에서 류광수 목사의 잘못된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지방교회와의 관련성을 지적하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신격화, 즉 지방교회에서 ‘사람이 하나님 된다’라고 하는 신화사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인용하며 비판한 것이다.
지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본질이 하나이지만 구별된 세 인격으로 존재 하신다는 정통 삼위일체와는 다르게 본질도 인격도 하나라는 삼일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신관은 양태론일 수밖에 없는데, 류광수 목사 또한 그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개혁측 나용화 교수는 “성자는 성부와 함께 같은 성령을 가지고 계시므로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전체로 성자 안에 내주하고, 성자는 전체로 성부 안에 상호 내주하신다”는 ‘상호내주’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이 교회 안에 함께 동시에 항상 계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성경적 진리이므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이라고 하면서 고려 총회 신학부의 지적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다락방을 옹호 하였다.
그러나 나용화 교수의 옹호는 정당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신격, 혹은 본질이 하나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중 삼위의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며, 위격들이 상호내재 해서 소위 ‘페리코레시스’라 불리는 상호교류와 상호순환이 있어 신성이 분할된 위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여 세 위격은 각각 자신 안에 동일실체 전부를 갖기 때문에 성부 안에는 성자와 성령이 있고,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있으며,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있으므로 각 위격은 실체에 관한한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
그러므로 이것만 보면 나용화 교수의 옹호가 어느 정도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갑바도키아의 바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 등 세 교부들의 연구에 의해 상호내주뿐만 아니라 상호구별에 가서야 비로소 정리가 되게 되었으며 오늘의 신앙고백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삼위간의 상호내재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는 서로 다른 위격들과 공유할 수 없는 특성이 있어서 상호 구별되기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아니고, 성자는 성부나 성령이 아니며, 성령 또한 성부나 성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를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하면 안 되는데, 나용화 교수는 그것을 무시하고 각 사람의 심령에 임한 성령의 내주를 양태론적 입장에서 삼위일체라고 한 것을 가리켜 정통 개혁주의 삼위일체라 하며 옹호하고 만 것이다.
물론, 각 사람의 심령에 임하는 성령의 내주를 하나님이 거룩한 영이시다라는 측면에서 성령이라 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며,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이나 여호와의 신,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삼위 하나님을 본질이 하나요 분리할 수 없는 같은 하나님이란 측면에서 여호와가 예수님으로 인용되기도 하며, 예수의 영을 성령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호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삼위를 말할 때에는 성령을 삼위일체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성육신 하신 분이 성자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되기도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성부라는 ‘성부 수난설’을 주장하게 되기도 하는데, 류광수 목사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류광수 목사의 삼위일체에 관한 양태론적인 입장은 이 외에도 많이 있다.
다음은 류광수 목사의 <현장복음 메시지>에 있는 것으로, 필자가 보기에는 여기에만 봐도 그의 양태론적 입장이 바글바글한데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그의 주장을 양태론이 아니며 정통 개혁주의 삼위일체라고 했던 나용화 교수가 이 글을 보면 뭐라고 변명할지 궁금하다.
{ △ 이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3가지 치료가 나타나는 것이다. 요 16:4~24절에 주님 재림 오시는 날까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보내사 너희와 영원히 같이 있겠다고 하였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 지금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 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완전히 힘이 생겨서 바뀌어 버렸다. 바리새인들이 모인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히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과 사람의 말을 듣는것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생각해 보라.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고 담대히 말했다.
△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니까,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다.
△ 이러고 나서 기도하는데, 행 4:29~39절에 성령이 그대로 임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이것이 안 되어지면 여러분의 일이 안되어진다.
△ 행 2:1~13절에 보니까,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는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거기 역사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힘을 얻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했는데, 앉은뱅이가 일어나 버렸다. 너무너무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계속 터집니다. 겁도 없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설치는 사울 앞에 주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 일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 어떤 사람은 큰 실수를 한다. 행 1:8절을 유언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죽었는가? 유언을 하시게? 부활하신 주님의 첫 번째 명령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힘하시면…” 이 말은, ‘나의 영이 너희에게 역사하면’ 이란 말이다.
△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살아계신 증거로 역사하시겠다는 뜻이다. 이 역사가 지금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
류광수 목사의 이와 같은 주장에는 그의 양태론적 주장들이 그대로 녹아 있는데,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그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 때까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이라 하면서 성령으로 너희와 영원히 같이 함께 있을 것이라 하셨는데, 그와 같이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 즉 ‘성부 = 성자 = 성령’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라 하였고,
둘째, 베드로가 그 사실을 깨닫고 바리새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한 다음 기도 했더니 성령이 임하셨는데 그것을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라고 하였으며,
셋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약속 하시고(요 14:16~17),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고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박해를 피해 도망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기도하였고, 오순절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방언을 하고 각 사람의 위에 불의 혀 같은 것이 갈라지는 모습이 보이게 되었는데 그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라고 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 하였으며,
넷째,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하신 다음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 가셨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란 뜻에서 유언이라고 한 것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비판 하면서 성령의 예고를 “나의 영이 너희에게 역사하면”이란 뜻으로 바꾸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제 2위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영과 성령을 같은 분으로 본 것 등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6~17절에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당신이 떠나가서 ‘다른 보혜사’를 보낼 것이라 하셨고, 그 다른 보혜사가 제자들의 ‘속에 거하실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때 다른 보혜사로 오셔서 성도들의 속에 계신 성령과 그분은 분명히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분이시다. 그런데도 류광수 목사는 그것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된 세 인격으로 존재하시지만 본질(본체)이 하나라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대한 표현이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성부는 성자나 성령이 아니며, 성자 또한 성부나 성령이 아니고,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다.
그런데 류광수 목사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양태론자가 아니며, 그의 주장을 정통 개혁주의 삼위일체라 할 수가 있겠는가!
2) 다락방의 기독론
류광수 목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도 부인한다. 그는 <복음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 하였다.
①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 1:14).
△ 우리가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② 그러므로 그분은 죄가 없고 그 영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5:45).
△ 고전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③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④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입니다(마 16:16~19).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다.
류광수 목사는 성육신의 목적을 설명하는 가운데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하며, “그 영이 하나님이므로 죄가 없다”는 주장을 하다가 “영은 하나님이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인성의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즉, 사람이라면 영혼과 육체가 있어야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데, 그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인성의 영혼이 없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이 있다고 함으로 그분이 참 사람도 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단이다.
그러면 류광수 목사는 양태론 뿐만 아니라 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