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
역경을 믿음으로 극복후 수많은 찬송시 남겨
생후 6주부터 95세까지 맹인으로 ‘한평생 삶’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인 외할머니의 깊은 영향
콜레라 창궐 극적 회심, 무디와 생키 등 동역자
일반적으로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로 잘 알려진 크로스비(Frances Jane van Alstyne, 1820년 3월 24일 - 1915년 2월 12일)여사는 시인, 작사가 및 작곡가인 미국의 선교사이다.
인생의 역경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 Crosbny)는 맹인의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고 수많은 찬송시를 남겼다.
한평생 장님으로 은혜로운 영혼의 찬송가 10,000여 편의 찬송시를 쓴 세계 최고의 찬양 전도자이자 찬송가 시인 화니 제인 크로스비! 화니 크로스비는 인간적으로는 한 평생 수많은 슬픔과 고통, 아픔을 거듭해서 경험한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역경을 극복하고서 미국인이 뽑은 대통령보다 더 존경하는 금세기 최고의 인물로서 그녀가 작시한 찬송가가 24편이나 찬송가에 실려 있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의 수많은 찬송가는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쳐진 것들이다.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 ‘너의 죄 흉악하나’(187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204장), ‘예수께로 가면’(300장), ‘인애하신 구세주여’(337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434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492장) 등등이 모두 크로스비의 작품이다.
화니 크로스비는 1820년 3월 24일 미국 뉴욕 주의 작은 마을 푸트남에서 출생하였는데,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 치료로 화니 크로스비는 생후 6주부터 95세까지 맹인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녀는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불행했다. 화니의 엄마 머시 크로스비는 어린 딸이 맹인이 된 사실을 알고 통곡하며 울었다. 가난하여 제대로 의사의 치료를 받아보지 못했다. 화니가 한 살 되었을 때 그녀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버지 존 크로스비까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1세에 과부가 된 그녀의 어머니는 남의 집으로 일하러 다녀야 했다. 화니는 외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순수하고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외할머니는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화니의 좋은 친구이자 선생님이었으며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다.
할머니는 모든 자연을 성경말씀과 연관 지어 설명해 주었으며 성경 말씀을 암송하도록 지도하는 훌륭한 성경교사 역할을 했다. 화니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시편과 잠언 룻기 등과 신약의 대부분을 암송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화니는 14세가 되던 해에 동네 유지들의 도움으로 뉴욕 맹아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834년 맨해튼에 새로 생긴 맹인 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등록했다.
그녀가 38세 되던 해인 1858년 크로스비는 학교 교사였던 맹인학자이며 음악가인 알렉산더 밴 알스타인과 결혼하여 1902년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생을 함께 하였다. 1858년 3월8일 화니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던 맹인 교수 밴 앨스틴과 결혼은 서로에 대한 깊은 헌신과 사랑으로 시작한 두사람에게 그윽한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화니는 결혼 후 곧 아기를 임신하였고 귀여운 아기를 출산하였지만 아기는 사망하고 말았다. 화니는 아기 잃은 슬픔에 잠겨 어느 누구의 위로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화니와 밴 부부는 다시 뉴욕의 맨하튼 이사를 갔다. 화니는 다시 모든 열정을 다 쏟아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에서 화니에게 찬송시를 써 달라고 주문이 쇄도했다.
화니 크로스비는 일 주일에 6,7편의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음악가들이 자신들의 곡에 붙일 가사를 그녀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남편을 주신 것에 항상 감사를 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 화니를 떠나 먼저 하늘 나라로 갔다.
그런데 그녀를 사랑해 준 데오르드 캠프라는 선생이 있었다. 그는 화니 크로스비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다. 그녀는 수많은 설교를 들었지만 감동이 없었다. 1846년 전염병인 콜레라가 창궐해 수많은 목숨들을 일시에 빼앗아 가는 것을 보며 화니는 쉽게 생명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일 콜레라가 자신의 생명을 빼앗아갔다면 나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하라는 말씀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고 뼈저린 경험을 한 뒤 자신의 신앙을 다시 점검했다. 그러던 중 브로드웨이 예배당의 부흥집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찬송가 141장 ‘웬말인가 날 위하여’를 부르는데 그동안 자신이 한 손에는 세상을, 다른 한 손에는 주님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리교 교인이던 그녀는 30세때 1850년 11월 20일,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설교가 끝난 후 찬송을 부를 때 그녀는 일어나서 “예수님, 내가 스스로 인생을 고쳐 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젠 주님이 내 삶을 맡으시고 주관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다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부른 찬송이다.141장 ‘웬말인가 날 위하여’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위해 큰 해받으셨나 /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 주 십자가 못 박힐 때 그 해도 빛 잃고 그 밝은 빛 가리워 캄캄케 되었네 / 나 십자가 대할때 그 일이 고마와 내 얼굴 감히 못들고 눈물 흘리도다 /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갚을줄 알아 몸밖에 드릴것 없어 이몸 바칩니다.’
이 찬송을 부르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니 한 구절 한 구절이 심금을 울렸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한 거룩한 슬픔’'에 견딜 수 없었다. 맹인이면서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보는 것보다 더 깊은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었다. 확실하게 보이는 주님 모습 바라보며 절망, 슬픔 아닌 기쁨, 감격, 승리, 찬송을 불렀다.
화니는 각계각층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시인, 소설가, 작가 뿐 아니라 정치인, 경제인, 대통령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 거리의 사람들 등 그들과 교류하면서 더욱 충만한 열정을 보였다.
특히 그녀의 찬양시에 곡을 붙여 주었던 소중한 동역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직접적인 만남을 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찬송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만들어준 미국음악의 개척자 ‘로웰 메이슨’, 화니의 서정시가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던 조지 루트,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에서의 진정한 동역자가 되어 준 윌리엄 브래드베리, 실베스터 메인, 로버트 로우리 박사, 윌리엄 하워드론, 무디와 생키 등 그녀에게는 소중한 동역자들이 었다.
하나의 일화를 소개한다. 한번은 화니와 동역했던 돈 박사가 사업상 철도로 이동 중일 때 그녀를 방문하여 기차 안에서 막 작곡한 찬송가 곡에 붙일 가사를 부탁했다. 그는 ‘지금부터 정확하게 신시내티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까지 40분의 시간 밖에 없다’고 했다 돈 박사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제목을 ‘주 예수 넓은 품에’로 생각했고 15분 만에 돈박사가 허밍으로 불러준 곡에 가사를 붙였다. ‘축복의 성령님께서 저에게 감동으로 말씀하셨어요!’하고 말했다.
1874년 어느 날 크로스비는 자신의 시집 출판회 기념식에 가야했는데 5달러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크로스비는 기도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난 크로스비는 찬송사를 쓰려고 분위기를 조성하며 방안을 거닐고 있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크로스비는 문을 열고 손님에게 "사랑하는 당신의 영혼에 축복이 임하시기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헤어지면서 악수를 하는데, 그 사람이 손에 쥐어준 돈이 있었다. 그 돈이 바로 5달러였다. 크로스비는 너무 신기하고 감사해서 찬송가 335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라는 찬송시를 쓰게 되었다.
크로스비는 늘 가방에 작은 성경과 미국기를 가지고 다니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에는 성경을 들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크로스비에게 힘을 주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시를 어느 부분에서나 거의 틀리지 않고 암송할 수 있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악보를 보는 다른 사람들보다 찬송을 더 정확하게 불렀으며 성경을 읽을 때에도 모든 장과 절을 외울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기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했다. 언젠가 그녀는 머리 안에 거대한 자신만의 서랍이 들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서랍에 시들을 넣어 두었다가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지 꺼내어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명성에 비해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다. 브루클린 근처에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사는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집은 초라했다. 사람들은 크로스비가 가난하게 산다는 것은 그녀의 선택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을 소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을 선교 시설로 보냈다
화니 크로스비가 90세가 되었을 때 영적인 삶에 있어서 최고의 해였다. 그녀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많은 청중들이 교회당을 꽉 메웠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15년 2월 12일 금요일 아침에 금세기의 가장 뛰어난 찬송가 작사가인 화니 크로스비는 95세를 일기로 조용히 하늘나라로 갔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생의 고난은 그것을 승화시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존귀를 안겨주는 선물이 될 수 있다. 아무리 큰 절망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는 희망과 감격의 통로가 된다. 고난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채찍이며, 고난은 승리의 전주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