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의 시간을 기다리며
조해정
이십대 시절에 난 꿈이 있었다. 기독 여민회의 문화부원으로 활동하던 난 평생을 기독. 여 성. 문화운동을 하리라고 생각했었다. 많은 여성들을 만났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싶어했 다. 전국 어디고 기독 여성들이 모인 곳이면 찾아가고, 문화 활동을 하면서 청춘을 지나왔 다. 그러다가 결혼하여 성남으로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새로운 삶의 도전을 받게 되었는데, 장애 아동들과 그 부모와의 만남은 내게 새로운 도전이 되었고, 인생의 항로를 확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뇌 기능부터 일반적이지 않아, 중복장애가 된 아이들을 보면서 많이 울고 탄식했다. 그리고 장애 아동 엄마들의 죄책감을 접하고는 분노까지 했다. 왜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세상은 왜 장애를 그렇게 경원시 하는지, 예수님과 성경말씀은 장애를 어떻 게 대하는가? 본인의 잘못도 아니요 부모의 잘못도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라고 그 분은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세상은 장애아를 낳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장애아의 어미들을 죄인시 하는 풍토를 보면서,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고 모든 일에 기가 죽거나,부모이기를 포기해 버리는 어미들을 보면서 나는 분노하게 되었다.
옷에다 실례를 하고, 늘 제 몸을 어딘가 부딪치는 아이들을 교육하면서, 죄의식에 갇혀 자 포 자기하거나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부모들을 질타하면서, 대책이 없어서 그저 손을 놓 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관공서를 찾아 문제제기를 하면서 지냈던 내 삼십대는 또 다른 열 정의 세월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니 그 열정이라는 것이 치열하기만 했지 아름답거나 현명한 것은 못 되었다. 장애 아동을 보고 있으면 그 부모의 탄식이 떠오르고, 그 부모를 보고 있으 면 짐스럽기만 했다. 그들은 내게 짐이었고 십자가였다. 늘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염려가 가득했고, 어미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동정심에 발을 구르면서,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것 같은 아니, 꼭 나만이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과 교만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직접 관여하려 했고, 그들의 마음이 손에 안 잡히면 화를 내고 차질이 빚어지면 못 견뎌했다. 최고로 잘 갖춘 장애아 교육시설을 만들려고 안달을 했다. 후진국으 로 보내지는 아이들을 돌보려고 재활원을 짓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나는 이 일을 강제로 떠맡게 된 것이라는 불만과 불평들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누구니? 장애아동과 너는 무슨 관계냐? 정말 장애 아동들이 너에게서 도움 을 받고 있니? 혹시 네가 도리어 그 아이들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냐? 어줍잖 은 동정심을 거창한 구원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그리고 누가 너더러 그 애들 을 도와주라고 시키기라도 했느냐?"
순간 나는 아무도 내게 이 일을 하라고 시킨 이가 없었 음을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 선택을 한 것이었지 아무도 내게 이 길을 가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내 안의 그 분이 나의 선한 의지를 키워 가신다는 사실을 몰 랐던 것이다.
아이들을 통해 오히려 나를 성장을 시키고 계심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나의 삼십대는 이렇게 장애아동들 속에서 성숙해져 갔다.
이십대의 끓는 열정은 속으로 품을 줄 알게 되었고, 이제 불혹을 넘긴 나는 그분 앞에 겸손하게 기다릴 줄도 알게 되었다. 조급함 이 앞서 계획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조급해 하던 마음대로의 내가 아니라, 그 분의 시간을 기다리며 그 분의 움직임에 나를 맞추어 가야 함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는 예전처럼 조급 해 하거나 안달을 하지 않는다. '안되면 못하는 거지 뭐' 그 분이 하시는 일이기에 믿고 기 다리는데서 오는 삶의 여유라고 할까? 늘 등뒤에서 밀어 주시는 그분으로 인한 새로운 배짱 이 생겼다고나 할까? 바울이 감옥속에서도 복음의 역사를 확신하며 편지를 쓴 그 심정을 비로소 조금 알 것 같다.